
“신경섬유종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경이의 병명이 밝혀졌다. 목 뒤쪽에 무언가 잡혀 처음 찾았던 병원에선 혈관 쪽 문제를 의심했다.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가족은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했다. 태경이 할머니의 협심증과 할아버지의 뇌동맥류를 치료한 인연이 있었다. 이곳이라면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신경섬유종은 수술이 유일한 치료법인데 수술한다 해도 종양 크기가 크게 줄지는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아이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소아신경외과 나영신 교수가 이야기를 이었다. “희망을 놓지 맙시다. 끝까지 해봐야죠.”
너무 무거운 질병 오른쪽 목과 어깨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종양은 주변 조직을 파먹고 기도와 척추의 신경을 압박했다. 점점 척추가 굽고 오른팔도 쓸 수 없었다. 온몸에 갈색 반점이 퍼졌고 하반신이 마비되다시피 해 태경이는 엉덩이를 질질 끌며 이동했다. 열심히 재활 치료를 해도 반복되는 수술에 효과는 제자리걸음이었다. 6살이 되면서 중증 장애 판정을 받았다.
보존 치료라 하더라도 결코 쉬운 수술이 아니었다. 주변 혈관 및 신경 손상 위험이 높았다. 한쪽 폐를 누르고 있는 종양은 제거하기 어려워 반으로 접는 수술을 하기도 했다. 한 번 수술할 때마다 2~3kg의 종양을 떼냈다.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마치면 태경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한 달 가까이 치료를 받았다. 할머니는 온종일 병원 밖에서 면회 시간을 기다렸다. 태경이와 눈이 마주치면 마음이 금세 무너졌다. “간호사 선생님, 면회 시간은 끝났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갈게요. 애만 재우고요….”
평소 할머니는 태경이를 업고 유치원을 오갔다. 태경이는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떠들곤 했다. “할머니는 어릴 때 뭐가 되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공부 열심히 했더니 선생님이 되더라. 태경이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뭐든 열심히 하면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할머니, 나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중환자실에서 잠든 태경이를 보면서 ‘지금 네가 어른이 되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구나’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세상으로 한걸음 초등학생이 된 태경이는 휠체어에 앉아 이동했다. 학교에서 가볍게 넘어져도 타박상이나 골절을 입었다. 코로나19로 학교와 재활 병원을 다니기 어려워지자, 아빠는 자전거를 선물했다. 다리의 힘도 기르고 이동할 때의 부담도 덜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기에 최적의 장소는 서울아산병원이었다. 어린이병원의 거의 모든 진료과를 들러야 하는 태경이는 아빠의 도움을 받아 병원 곳곳을 달렸다. “이야~ 태경이 멋있다!” 페달을 돌리며 등장하는 태경이를 의료진 누구나 반겨주었다.
외출이 잦아질수록 또 다른 고민도 생겼다. 사람들이 태경이를 빤히 쳐다보거나, 동생과 같이 다니면 “누나랑 왔구나?” 하고 물었다. 연년생 동생 현아가 10cm나 더 커버린 탓이다. 작은 키만큼 태경이의 마음도 위축되었다. 엄마는 태경이가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태경아, 친구들이 네 몸에 대해 물으면 ‘너도 감기 걸릴 때 있지? 그러면 약 먹고 병원에 가잖아. 나도 아파서 그러는 중이야’라고 씩씩하게 이야기해 줘.” 옆에서 듣던 동생이 먼저 “알았어!” 하고 당차게 대답했다. 태경이도 끄덕였다.
10년을 기다린 희망 “나는 언제까지 병원에 가야 돼?” 2018년 대수술을 두 번 거치면서 태경이는 지쳐 있었다. 늦겨울에 입원해 여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고생한 보람도 없이 종양은 빠르게 자랐다. 또 수술 이야기가 나올까 병원에 가는 날이면 예민해졌다.
그즈음이었다. 소아청소년전문과 이범희 부교수가 새로운 치료법을 이야기했다. “‘셀루메티닙’이라고 종양 크기 감소에 효과를 보인 유일한 약제를 임상 연구하려고 합니다. 태경이에게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익히 아는 약이었다. 몇 년 전 외국에서 이 약이 나왔다는 정보를 접하고 병원에 문의했지만 “언제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른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이 부교수가 해외 연수를 다녀오면서 임상 연구를 추진한 것이다. “기회만 닿는다면 해야죠!” 10년 전 나 교수가 이야기했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꾸준히 서울아산병원에 다닌 게 태경이의 운이었나 봐요!”
태경이의 열 번째 여름 이 부교수는 글로벌 제약회사에 치료가 절실한 태경이의 사진과 자료를 보냈다. 그리고 50명의 임상 대상자에 태경이를 포함시켰다. 복용한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은 종양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몸이 조금 더 가뿐해진 태경이는 스스로 서보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 선생님도 태경이의 달라진 모습을 알아챘다. “항상 부어있는 오른쪽으로 엎드려 있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 똑바로 앉아있는 시간이 늘었어요. 자신감이 붙고 표정도 밝아졌고요.”
서울아산병원에 가는 날, 아침 일찍 부자는 차에 올라탔다. 아빠는 태경이의 자전거를, 태경이는 이 부교수에게 쓴 편지를 챙겼다. 태경이는 서울 가는 내내 아빠의 운전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나중에 자동차 엔지니어가 될래요!” “그럼 태경이가 만든 차에 아빠도 태워줘~.” 아빠는 태경이의 야무진 꿈이 듣기 좋았다. “근데 그 편지엔 뭐라고 썼어?” 태경이는 들뜬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주었다. “이범희 교수님께. 항상 밝은 얼굴로 맞아 주시고 좋은 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태경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