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이야기
[정신건강칼럼 6월] 페르세포네 컴플레스(Persephone Comple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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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포네 컴플레스(Persephone Complex)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심리전문가 노은아
“새로울 게 뭐 있겠어?”하며 별 기대 없이 봤던 2017년판 영화 ‘미녀와 야수’는 역시 참신함은 그닥 없었지만 줄거리나 인물들의 진부함을 상쇄시킬 수 있는 의외의 장치들이 많아서 꽤 몰입하며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프랑스의 어느 마을을 재연했다고 하는 주인공의 마을, 포르투갈의 유서깊은 대학도서관이 모델이 되었다는 성안의 바로크풍 도서관, 실제 인물의 얼굴보다 더 표정이 살아있는 야수분장, 애니메이션 인물에 생명력만 불어넣은 것처럼 그대로 재현된 개스톤, 흥겨운 합창장면, 자연스러운 CG 등등….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욱 독립적이고 주관이 뚜렷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주인공 벨이 눈에 띄었는데요, 특히, 야수의 성 감옥에 갇혀있던 아버지를 힘껏 밀어내고 떠난 보낸 후, 자신이 갇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와의 이별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구체제나 기존가치에서의 탈피, 가부장적 질서의 거부, 과거와의 작별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는 주인공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대상으로 결국 아버지를 떠남으로써 또 다른 세계, 새로운 도전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실제 현실에서 대부분의 소녀들이나 여성들에게 가장 가깝고 중요한 대상이자 심리적 재탄생을 위해 극복해야 될 대상은 어머니입니다. 이는 페르세포네 콤플렉스라는 전통적인 심리학적 개념을 통해서도 나타나는데요, 페르세포네는 땅의 여신 데메테르가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자 어머니인 데메테르가 애지중지하는 아름다운 소녀였는데, 어느 날 꽃을 꺾다가 지하의 신 하데스의 눈에 띄어 지하세계로 납치됩니다. 이에 데메테르는 백방으로 딸을 찾아다니고 그녀의 분노와 고통이 지상의 기근과 가뭄으로 이어지자 제우스가 전령 헤르메스를 통해 페르세포네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이미 저승의 음식을 먹은 후였기에 그 세계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게 되었고 결국은 한 해의 1/3은 지하세계의 여왕으로 하데스와 함께 하고 나머지 기간은 지상세계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걸로 타협하게 되는데, 페르세포네가 지하왕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겨울의 연원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페르세포네 신화는 모녀의 이야기이자 분리와 재결합의 이야기면서, 한편으로는 성인의 문턱에서 성장으로의 길을 향해 갈등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페르세포네는 위험하지만 지하세계의 여왕, 온전한 한 여성의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 vs 따뜻하고 안전하지만 꽃을 꺾는 어머니의 어린 딸로 남아있어야 되는 세계간의 선택 속에 있습니다. 페르세포네가 진정한 재탄생과 성인으로서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하세계라는 죽음을 통한 통과의례가 필수적으로 수반되며 그 과정에는 어머니와의 철저한 단절, 이로 인한 상실의 고통도 포함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소녀들에게는 탄생 이후부터 보살핌을 받아온 가장 의지하는 대상이나 또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역할을 모델링하는 대상이므로 어떤 관계보다도 분리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가장 의지하고 또 동일시하면서도 극복해야 될 딜레마의 대상이니까요. 동시에 어머니 또한 딸과 분리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데메테르도 사랑스런 딸을 자신의 대지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뭇남성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어머니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소녀들이 자라면서 느끼는 갈등에는 강력하고 안전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서 홀로서는 존재가 되는 두려움 뿐만 아니라 자신이 떠남으로써 어머니가 쓸쓸히 남겨지는데 대한 걱정, 죄책감도 의외로 큽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가 죽음의 세계를 거쳐 완전한 성인으로 탄생한 후, 어머니의 세계로 돌아오고 재결합하는 것처럼, 대지의 여신 또한 딸의 상실이라는 고통, 소멸의 시간 이후, 만물이 소생하는 진정한 봄을 잉태하게 되는 것처럼, 어머니와 딸 모두 각자의 성장이나 관계의 성숙을 위해 상실이나 분리의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