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만 주는 여자친구와 헤어지지 못하겠어요.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심리수련생 박아름

유년기를 돌아보면 K씨는 불행했던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아버지에게 명품을 사달라고 조르며 물리적인 위협도 서슴지 않던 어머니의 히스테리를 들었던 기억, 공부를 하지 않고 친구들과 놀았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호된 매질을 당했던 기억, 온 몸의 멍을 친구에게 들켰던 날 자신을 덮쳤던 깊은 슬픔과 수치심… 불행하고 어두운 기억만 가득한 유년기를 K씨는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버텨왔습니다. 과시욕이 강하고 감정기복이 극심했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만나 집을 나갔고, 아버지 역시 무기력했기 때문입니다. K씨는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K씨가 끌리는 여성은 어머니와 닮은 모습이 많았습니다. 짙은 색조 화장의 화려한 겉모습뿐만 아니라 흥청망청 돈을 쓰는 습관도 비슷했고, K씨와 동시에 다른 남자를 만나는 불성실한 모습,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면 K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불 같은 성격까지도 어머니와 닮았습니다. 평소 ‘검소하고 참한 여자’를 이상형으로 꼽던 K씨는 왜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에게 끌리고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에서는 과거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반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충동을 반복강박 (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과거 행동의 반복이 잊혀진 기억을 언어적으로 회상하는 대신 행동을 통해서 기억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전에 극복하지 못했던 고통스러운 상황을 심리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불행을 반복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K씨의 마음 속에도 어머니를 닮은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렸던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무의식적 욕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소하고 참한 여자’의 사랑이 아닌 어머니처럼 강하고 화려한 여자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려는 욕구가 역설적으로 불행한 연애를 반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