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계절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강유리

사람들은 일생에 걸쳐 수많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유년기에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의 관계 맺기를 시작으로, 청소년이 되면서 또래관계, 이성관계 선생님과의 관계로 인간관계가 점차 넓어지게 됩니다. 성인기에는 직업상 대인관계나 배우자와의 결혼을 통해 이룬 가족, 자녀와의 관계를 새로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의 시기에 따라 특정 사람과의 관계의 양상이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장년기에는 노인이 된 부모와의 관계에서 돌봄의 주체가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성인이 된 자녀와 평등한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고, 때론 떠나 보내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지요.

이처럼 한 사람의 삶은 변모되는 대인관계에 연속적으로 적응하는 과정 속에 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사람의 삶에는 특정한 단계가 있으며, 각 단계별로 외부환경과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발달 과업이 있다고 봅니다. 흔히 ‘발달’이라고 하면 소아청소년기의 성장이나 성숙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에는 성인기를 포함한 인생 전반에 걸쳐 정신적, 인격적 발달이 진행된다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노년기의 삶과 발달과업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습니다.

만약, 현재 스트레스나 심리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이것이 인생의 특정 시기에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스트레스는 아닌지,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정상적인 과정은 아닌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가 부모에게 냉랭하게 대하고, 방문을 꽝 닫아버리는 등 이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합니다. 만약, 부모가 성인의 독립성을 조금씩 획득해나가는 사춘기의 발달과업을 이해한다면, 급작스럽게 변화된 자녀의 행동에 대해 당황하거나 불필요한 걱정을 하기보다 너그럽게 자녀의 발달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신체의 쇠약이나 병환, 배우자의 사별 등의 이유로 힘든 노인이라면, 비록 고통스럽겠지만 이런 과정이 삶의 유한성에 대해 깨닫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가끔씩 자신이 인생의 단계에서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지를 되돌아보고, 시기에 맞는 고민을 하는 과정은, 마치 인생이라는 시계의 건전지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갈아주는 일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삶의 어느 지점에 있으신가요?